30대 중반 전문직 여성이 30대 후반 같은 분야 전문직 남성과 사귀다 보내온 사연입니다. 결혼에 거부감이 심한 초식남과 연애 중에 또 다시 사소한 트러블로 헤어짐을 겪었다고 하소연하는 장문의 글이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1차로 보낸 답변 이메일입니다.


대강 읽었습니다. 지금 자야 되는 시간이라 아내랑 며칠 전에 했던 이야기만 먼저 쓰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아내는 종교적인 믿음에 버금갈 정도로 저를 사랑합니다. 뭐 이 정도면 최선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 아가, 너랑 나랑 사랑하고, 그걸 서로 알고 있긴 한데, 오빠가 몇년 지나도록 결혼하자는 말을 안하면 어떨 거 같애?

아가 : 서로 사랑하는 거에요? 그럼 계속 사귀면 되죠!

: 언제 결혼할 지도 모르고, 결혼 이야기 하면 안 좋아하는데?

아가 : 그래도 좋은데 계속 만나야죠! 결혼이 목적은 아니잖아요? 좋은데 옆에 있고 싶은 거지!

: 그럼 서로 사랑하고 있긴 한데, 내가 독신주의자라고 하면?

아가 : 마찬가지로 오빠랑 계속 사귈 거에요. 사랑하는데 어떻게 헤어져요?

: 아~ 음~ 그렇구나~.

아가 : 왜요?

: 결혼 안할 거면 헤어지자고 하는 여자들도 많아. 나도 겪어봤고, 내 후배도 겪어 봤고.

아가 : 응? 사랑해서 결혼 하자면서 왜 헤어지자고 해요??

: 결혼할 사람이 필요한 거지. 그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가 : 히익~~ 난 이해가 안되네.

: 그래 나도 이해가 안돼. 사랑해서 결혼하자고 하는 거면, 당장 결혼 안해준다고 헤어지겠다는 건 모순이잖아. 그래서 나도 그런 여자들은 다 뿌리쳤어.


제 아내가 좀 바보같죠. 어수룩하죠. 계산할 줄 모르죠. 그런데 나름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저도 아내에게서 많이 배웁니다. 계산할 줄 모르는, 조건 없는 사랑의 방식을 약간 맹한 제 아내에게서 배워 나가는 중입니다. 사랑은 맹목적입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이듯이. 진정한 사랑은 맹목적이죠. 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든 없든 지금 사랑하기에 헤어질 수 없기에 계속 만나 가는 것 뿐입니다. 

아마도 초식남인 그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느껴지기 보다는, 저 여자는 결혼할 사람이 필요한 거였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결혼과 함께 쏟아지는 모든 책임감 의무 구속 그리고 처가와의 관계설정 등의 부담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거죠. 그는 마치 나그네와 같군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매서운 비바람이 아니라 따듯한 햇살이었듯이, 결혼에 부담감이 많았던 저에게 부담없이 결혼할 수 있게 용기를 준 것은 맹목적이고 바부같기도 한 제 아내의 사랑이었습니다.

그에게 결혼을 압박하는 건 나그네에게 불어닥친 매서운 비바람 아니었을지? 맹목적이고 진실한 사랑.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며 너에 대한 헌신이 나의 행복이라는 진심이었다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도 나를 위해주고 아껴주고 결혼이라는 족쇄로 종속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논리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도 기꺼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글이 길어지니 나중에... 


다음은 2차로 보낸 이메일입니다.


저도 나쁜남자+초식남 에 가까웠죠.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꼭 너 아니어도 되고 언제든 여자는 만날 수 있고 그러니 헤어져도 되고 이런 생각이 강해져 갔고요.

연애란 저에겐 물질적/육체적/정신적 소모에 가까웠습니다. 항상 신경써야 하고 연락해야 하고 만나야 하고 기분 살펴야 하고 계획 짜야 하고 지출이 생기고 쉴 시간이 줄어들고 집에서 만나도 항상 신경 써줘야 한다는 점에서 주말에도 "일"을 하는 느낌이라 오히려 쉬는 시간이 줄어드는 짜증이 가끔 울컥 울컥. 

그렇다고 쉰다고 하면 왜 피곤하냐고 따지는 여자들, 뭐가 피곤하냐며, 남자가 뭐 그러냐며... 아오... 말 한마디 설명하는 것도 피곤할 지경. 그래서 혼담이 오가기 시작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무거워지고 돌뎅이가 가슴을 짓누르듯 뭔가 모를 압박감.

하지만 아내를 만난 후에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죠. 아내는 제 모든 제스쳐에 웃으며 좋아했고 제가 방에 들어가서 자도 티비도 켜지 않은 체(시끄러울까봐) 조용히 제가 깰 때까지 기다렸어요. 아내는 제 얼굴이 너무 좋아서 뽀뽀를 해줬고 저는 그 뽀뽀로 얼굴을 맛사지 받으며 잠들기도 했고요.

아내는 제가 뭘 해도 같이 붙어 있기만 하면 좋아했고 즐거워했어요. 원하는 건 없었고, 오직 오빠의 살결과 입술을 원할 뿐이었죠. 비싼 선물 따윈 없었고, 기념일 하나 챙긴 적이 없고, 비싼 레스토랑 한번 같이 간 적이 없지요. 오히려 아내는 자기가 만든 음식으로 절 먹이는 것을 즐거워 했고 행복해 했지요.

그러니 아내랑 있으면 너무 편했습니다. 친구이자 여동생이자 아내이자 애인이자 강아지 심지어 (좋은 의미로) 엄마 같은 느낌도. 그러니 아내가 없으면 허전했고, 아내 없이는 아무것도 재미가 없었고 아내랑 있으면 모든 것이 즐거웠습니다.

이것은 결혼한 지 일년 반쯤 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아내 없으면 모든 게 재미 없고, 아내가 있으면, 심지어 아내가 절 껴안고 자고 있어도 마음이 흡족합니다.

아내는 저에게 원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 오히려 저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고 결혼 과정에서도 아내는 예물이니 뭐니 저에게 원한 게 없었고 다만 오빠랑 맺어졌다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금가락지 하나 정도 맞췄을 뿐이죠.

비싼 리조트 가지 않아도, 아내는 내 품이 항상 천국이라고 했고, 아내는 내 냄새를 너무 좋아해서, 나 없으면 기름기 쪄들어 있는 제 베개 냄세라도 맡으려 했죠. 제가 식중독으로 아파할 때 아내는 제 온몸을 주물러 주며 눈물 뚝뚝 흘렸고요.

아내는 모든 걸 제 위주로, 제가 편할 데로, 제가 기쁠 데로, 제가 피곤하지 않을 데로 맞춰서 생각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나쁜 남자"컨셉의 남자였지만 아내를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점차 깨닫게 되었고 그토록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저도 아내를 위한 헌신이 즐겁고
아내가 즐거워하면 나도 즐겁고 아내가 힘들어 하면 위로해주고 싶고 날씨가 추우면 아내 추울까 걱정되고 날씨가 더우면 아내 더울까 걱정되고 그렇습니다.

결혼은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할 뿐이죠. 당신이 먼저 헌신적이고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면 아니 보여주려고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말고 진짜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도 마음이 돌아설 겁니다.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즐겁지 못할 테니까요.

취미생활? 아내는 제 취미생활이 뭐건 같이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여자들이 정말 싫어하는) 바둑까지 배웠습니다. -_-;; 밤낚시? 아내는 제가 밤낚시 하는 거 반대 안합니다. 다만 따라온다고 할 뿐이죠.

결혼을 목적으로 행동하지 마시고 이 사람 옆에서라면 너무 행복하고 떨어져 있는 것은 고통이다 이런 마인드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죠. 그것이 바로 나그네가 외투를 흔쾌히 벗어버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죠. 초식남은 나쁜남자보다, 마초보다 훨씬 힘든 상대입니다. 애초에 가정을 이루려는 목표가 없고 그것을 굴레와 구속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생각해보세요. 결혼을 원하세요? 그럼 다른 남자 찾으셔야죠. 그 사람을 원하세요? 그럼 다른 건 원하지 마세요. 그 사람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미래는 생각하지 마시고 3년 후에 헤어져서 낙동강 오리알 될까 두려워 하지 마세요 나이 들어 아이 못 낳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애 낳고 싶어서 결혼합니까? 차라리 정자 은행에 찾아가셔야죠. 애를 낳은 이후에도 항상 인생의 1순위가 배우자가 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미안해. 오빠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결혼을 졸라 댄 것 같아.  그것이 오빠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 지 이제서야 상상이 가.  앞으로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께.  오빠 옆에 있는 순간 그 자체에 행복하고 만족하며 살께.  결혼따위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  다만 오빠 얼굴을 보는 것이 정말 내겐 소중하고 중요해..."

이런 식의 손편지를 써서 그 사람의 병원으로 혹은 집으로 우편으로 부치는 것이죠.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제가 약간 포인트를 잘못 짚었더군요. 그녀는 결혼을 푸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헌신적이고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요즘에도 이런 여성이 있긴 있더군요. 어찌 보면 제 아내보다 더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좀 놀라웠습니다. 다음은 3차로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오매... 하실만큼 하신 것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애교가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점인데 저는 알 수 없고요. 초식남이라기 보단 유아틱하고 이기적인 것 같아요. 지배욕구가 남달라서 자기 뜻대로 안되면 견디질 못하는 스타일. 그냥 무조건 네네 하던가 헤어지던가 양자택일만 존재하는. 

님은 하실만큼 충분히 하신 것 같아요. 사랑을 충분히 차고 넘치게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은... 결국 후회하겠지요. 쉽게 말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죠. 

아내랑 님 이야기를 어제 잠깐 했는데 ㅡ 아내는 졸려서 듣기만 했어요 ㅡ 한번더 해보고 다시 말씀 드릴게요. 지금은 다만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거에요. 조그만 감정적 트러블 때문에 토라지는 것 정도가 아니라 매섭게 돌아서는 사람, 불안해서 어찌 하나요? 이건 언제 정전되서 전기 나갈지 모르는 병원에서 수술해야 하는 살떨림 같은 거겠죠. 

충분히 사랑한 자, 사랑 받을 자격도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님의 맹목적인 사랑과 배려가 버릇(?)을 잘못 들여놨는 지도. 저는 그런 사랑의 가치(?)를 금방 알아봤기에 아내와 결혼해 지금껏 행복한 거구. 그 사람은 야구로 치면 선구안이 꽝인 타자랄까. 

남자가 막내 혹은 외동인가요?


저는 글을 적다가 아내가 와서 글을 급하게 접었고 그녀에게서 다시 답장이 왔습니다. 마음을 차츰 정리하고는 있지만 마음이 힘들 그녀에게 힘 내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인연은, 다른 곳에 또 있기 마련일테니까요. 진흙 속의 보석을 애타고 찾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상담 사연은 lovewartalk@gmail.com 으로 접수 받습니다. 

블로그 포스팅을 전제로 상담을 하고 있으나 개인 정보 혹은 개인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빼고 게재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