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라는 서양 풍습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벤트로 변질되었다.
며느리, 명절 돌아오는 부담감.
이미 결혼하기로 약속된 마당이고, 상견례 치르고 집 알아보는 와중에 하는 프로포즈 타령은 답답하기 그지 없다. 마치 "날 한번 놀래켜봐"라고 기다리는 사람을 놀래켜야 하는 입장이랄까. 남자들은 이미 결혼하기로 한 거, 왜 쌩뚱 맞게 프로포즈까지 해야 하는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여자들은 그래도 '남들 한다는 거, 평생 한번인 거' 자긴 안하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 드니 원하는 거겠지. 기능 중심적인 남자들 입장에선 쓸데없는 짓이고, 감성 중심적인 여자들은 뭔가 대접받는 느낌을 원하는 것일 게다.
게다가 남들과 '비교'하기 좋아하고 '평가'까지 하려드는 여자들에게 프로포즈 한다는 것 자체가 머리 아프게 시험 보는 일과 비슷할테니 아예 안하려고 드는 것일 수도 있다. 작은 거 바란다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자들이 어디 작은 거에 만족하는가? 작은 편지지 하나 읽어주고 싸구려 반지 하나 줘봐라. 안하니만 못한 프로포즈였다고 평생 이러쿵 저러쿵 씹힐 것이 뻔하다. 남자들은 화이트 데이만 되어도 며느리 명절 돌아오듯이 부담감이 크다. 하물며 프로포즈는 그 부담감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지들이 프로포즈를 준비해 봤어야 말이지...)
화려한 프로포즈, 초라한 결혼생활.
내 친구 이야기 잠시 해보자. 같이 해외여행 나갔을 때 여친에게 프로포즈 안 한 것을 두고 여친과 싸우고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여친이 단단히 삐쳤으니 다가오는 프로포즈에 대한 압박감은 이루 상상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프로포즈 어떻게 멋지게 할까 몇개월을 고민하다가 결국 기백만원 들여 멋지게 프로포즈 했던 내 친구, 지금 아침밥/저녁밥도 못 얻어먹고 살고 있다. 내 친구가 백수도 아니고 억대 연봉이다. 그리고 친구 아내는 자신이 번돈은 모두 자신의 여가/취미 활동으로 모두 써버린다. 남편 대접이 형편 없어 가끔 짠해 보이지만, 짠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형국.
프로포즈 따위, 한적도 없고 심지어 사랑한다/사귀자는 말도 안했는데 사귀고 결혼하게 된 내 케이스를 보면, 날마다 진수성찬 얻어먹고 (사진 링크) 설거지 아내가 다 한다. 오빠 다리 아프냐고 다리도 주물러 준다. 아내는 오직 나만 생각할 뿐 다른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행복해 어쩔 줄 모른다. 물론 나는 '물 한방울' 소리도 안했고 "평생 호강시켜 줄께" 따위의 공수표도 날리지 않았다. 나도 내 인생 장담이 안되는데 누구 인생을 장담하랴. 하지만 초저녁 잠 많은 아내가 잘 때는 항상 내 품안에서 잠들 수 있도록 곰돌이가 되어주고 아내가 좋아하는 스킨쉽은 무한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결혼`식`이 중요한가 결혼 `생활`이 중요한가.
사랑한다 소리 한번 안하는 게 섭섭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꼭 말로 들어야 그것을 아느냐고 되묻는 아내다. 날마다 오빠의 사랑을 듬뿍 느낀다고 말이다. 결혼한 내 친구들은 아내에게 밥 한끼 얻어먹기도 힘든데 너는 무슨 재주로 그리 음식 잘하고 살림 잘하는(?) 여자만 골라 만나느냐고 묻지만 나도 잘 모른다. 사귀고 보니 원래 엄청 잘하던 애도 있었지만, 내 아내는 후천적 노력으로 잘한다. 나 만나고 나서부터 각종 요리 블로그를 훑고 다니더니 지금은 아주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맛있고 빨리한다. 게다가 맞벌이. 여자도 남자 하기 나름 아닌가 싶다.
결혼하기로 암암리에 약속 다 된 거라면 살면서 느끼는 만족과 행복이 중요하지 프로포즈가 뭐가 그리 중요하랴? 내 친구는 아내랑 놀러다니다 다퉈서 지방에 아내 놔두고 혼자 올라와 버리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성질 순하기로 유명한 내 친구인데 얼마나 긁어댔으면 그랬으랴 싶다. 오히려 내가 성격 있다는 소리를 좀 듣고 급한 편인데, 나는 어디 다니다 아내랑 가벼운 말다툼도 해본 적이 없다. 아내는 불평/불만이 없기 때문이다. 요는 형식에 연연하지 말고 내용에 충실하자는 이야기다.
남친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남친을 사랑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내에게 수천만원짜리 티파니앤코 1.5캐럿 다이아 반지 끼워주고 늦은 밤까지 술 마시러 다니며 아내 속 썩히는 남편보다는, 500원짜리 뽑기 가락지를 끼워주더라도 칼퇴근하여 아내랑 부비부비, 쎄쎄쎄 하며 놀아주는 좋은 남편이 되길 바란다는 뻔한 잔소리다.